딴지일보_21세기 명랑사회를 향하여

    #62 <특집> 광주는 시나리오다.


        - 삼성물산의 100억 견적서 뻥튀기 : KBS 이재석 기자 -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총선전략 : 정청래 전 의원 - 김정은이 쏘아올린 미사일 속 메세지는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 5.18 광주,...

     

     

    - 삼성물산의 100억 견적서 뻥튀기 : KBS 이재석 기자

    -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총선전략 : 정청래 전 의원

    - 김정은이 쏘아올린 미사일 속 메세지는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 5.18 광주, 사살명령이 있었다 :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 + 김용장 전 미 정보부대 군사정보관

    - 가계지출 줄인 착한 저물가 : 건국대학교 최배근 교수

    - 초선의원의 전투본능, 낙선의원의 낙선팁 :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 + 군 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김광진 사무국장

     

    https://www.podty.me/episode/11734006
     

     

     

    62회 오디오 버전 듣기+다운로드 ▼

    https://podty.gslb.toastoven.net/meta/episode_audio/41512/partner_1558093962674.mp3

     

    #61 유시민, 삼바 그리고 까불면 죽는다.


      - 손혜원&정청래와 함께하는 목포탐방, 정세분석 : 전 국회의원 정청래 - 삼성바이오 서버암매장 누가 시켰나? : 주진우 기자 - 삼바 엔드게임, 콜옵션은 빚이다 : 참여연대 김경률...

     

    - 손혜원&정청래와 함께하는 목포탐방, 정세분석 : 전 국회의원 정청래

    - 삼성바이오 서버암매장 누가 시켰나? : 주진우 기자

    - 삼바 엔드게임, 콜옵션은 빚이다 : 참여연대 김경률 회계사

    - 재철이형, 형이 왜 거기서 나와... : 더불어 민주당 사무총장 윤호중 + 전 국회의원 최민희

    - 민브라더스의 여의도 인물평 : 더불어 민주당 기동민, 김종민 의원

    - 어벤져스보다 스포에 민감한 다큐멘터리 ‘김군’ : 강상우 감독

    - 도리도리 뇌파와 정치 : 오타와대 김우재 교수

    - [예술로 함께] 진짜 출범! : 피아니스트 김철웅 + 소프라노 민은홍 + 테너 민현기

     

     

     

    손혜원&정청래와 함께 걷는 역사문화 탐방

    https://docs.google.com/forms/d/e/1FA...

     

    김철웅 단독콘서트 2탄 남북 가곡의 밤

    https://www.bunker1.net/m/2.0/grp_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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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소년은 탱크를 보았다

    그날 소년은 탱크를 보았다


        난 오랫동안 광주에 살았고 이건 내가 유치원 다닐 때의 일이야. 당시 난 교회 부속 유치원에 다니던 꼬마였어.   그날은 좀 이상했던 걸로 기억해. 내가 다니던 유치원은 도청과 멀이...

     

     

    난 오랫동안 광주에 살았고 이건 내가 유치원 다닐 때의 일이야. 당시 난 교회 부속 유치원에 다니던 꼬마였어.

     

    그날은 좀 이상했던 걸로 기억해. 내가 다니던 유치원은 도청과 멀이 않은 곳에 있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차들이 다니는 거야. 그땐 길거리에 노란택시가 지나가도 눈에 띄어서 "노란택시~"하며 옆사람 꼬집는 놀이를 하던 때였으니, 시커멓고 소리가 큰 차는 어땠겠어. 탱큰지 장갑찬지는 모를 꼬마였지만 기억만은 생생해.

     

    암튼 여느 때와 같이 유치원에 갔는데 문이 굳게 잠긴 거야. 이상하다 싶었지. 나 말고도 3명 정도 친구들이 같이 있었어. 우리끼리 오늘 빨간날인가? 아니지? 하며 30분을 기다렸는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선 응답이 없는 거야.

     

    게다가 주변 도로에선 시커먼 트럭이랑 아스팔트를 긁는 듯한 소리를 내는 차소리가 났어. 덜컥 겁이 났지.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으로 냅다 뛰어들었어.

     

     

    집에 도착하니 울엄마가 빛의 속도로 내 손을 잡아끄셨어. 엄니는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불(울엄마 혼수이불인데 두꺼운 겨울이불이었어. 아까워서 아무리 추워도 잘 안 꺼내던 이불이야)을 나한테 뒤집어 씌우는 거야. 난 어안이 벙벙했지. 겨울도 아니고 잘 시간도 아닌, 해가 창창한 날이었는데 말이야.

     

    근데 엄니한테 물어도 엄니가 답을 안 해주는 거야.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불 안 어둠속에서 엄니가 떨고 있었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해.

     

    나도 덩달아 무서웠지. 얘들은 그러잖여. 누가 울면 따라 울고. 암튼, 우린 방안에 움크리고 있었고 창너머로 간간히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어. 난 비가 오나? 그래서 엄니가 무서워하나? 싶었지. 

     

     

    수일이 지나(사실 이 중간의 기억이 없어. 머리속에선 그 이불 속 안부턴 암흑이야), 김장 때인 걸로 기억해.

     

    동네 아줌마들이랑 울엄니가 마당에서 김장 담그는 장면으로 이어져. 그때 주변에서 놀다가 어른들이 무척 수군대며 이야기 나누는 걸 들었어.

     

     "앞집 신혼부부 있잖여. 신랑이 아직도 집에 안들어왔대."

     

     "어째야쓰까.. 짠해서.."

     

    그러곤 다들 말없이 김장만 담그시는 거야.

     

    그제서야 난 `아! 맞어. 앞집 아저씨` 했어. 생각이 번뜩 나더라구.

     

    울앞집 하늘색 대문집엔 신혼부부가 살았어. 당시 난 바가지머리라 불리던 버섯돌이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건 80년대 꼬마 사내들에겐 초 레어한 헤어스타일이었지. 그런 내 머리를 귀엽다고 쓰다듬으며 눈깔사탕을 자주 사주시던 아저씨였어. 아저씨라 해봐야 내 눈에 아저씨이지, 생각해보면 고작 20대 중반이나 후반 됐을 나이였지. 

     

    근데 그 아저씨가 안 보이는 거야. 어디 가셨나?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어. 난 꼬마였으니까.

     

    얼마 뒤 남은 새댁이라 불리던 하늘색 대문집 아줌마도 이사를 갔더랬지. 그때의 기억은 거기서 끊겨. 엄니도, 주변 사람 누구도 내가 대학 갈 때까지 그 당시 일을 꺼내지 않았어.

     

    그때 광주는 그래야만 살아남는 분위기였던 거 같아. 다들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는 분위기.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됐지. 그때 그 아저씨가 5.18 때 행방불명 된 거구, 아마도 그분은 돌아가셨을 거란 걸.

     

     

    망월동 갈 때마다 사진이 남아있는 무덤 앞에서 그 아저씨 얼굴을 떠올려보곤 했어. 근데 당최 그 아저씨 얼굴이 제대로 떠오르지가 않는 거야. 아주 하얗게 지워져있어. 그때 울막내 이모랑 사귀던 아저씨 얼굴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그 아저씨 얼굴은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이 안 났어. 몸 형체는 떠오르는데 얼굴은 온통 하얗게 지워져있어. 

     

    시간이 흘러 흘러 난 대학을 가고 짱똘을 들었어. 그제서야 5.18 당시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온 동네가 우리 동네란 걸 알게 됐지. 울동네 윗 동네가 나 에 나오는 기독교병원이고 근처에 도청이 있다보니 그랬던 거겠지. 

     

    처음 짱돌을 들고 나왔던 거리에서, 꿀꿀이차(페퍼 포그 최루탄을 다연발로 쏘는 차)에서 쏟아지는 최루탄 연기보다 나를 더 얼어붙게 만들었던 두려움은 바로 총소리였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겁이 난다거나 무섭다 정도가 아니라 근원적인 공포랄까. 내 마음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그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페퍼 소리에 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집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내내 그 소리가 주는 압박감에 힘들었어. 내가 특별히 심약했거나 그런 건 아냐. 되려 겁대가리를 상실해서 개피 본 적이 많았지.

     

    그리고 군대 사격장에서 다시 그 소리를 듣게 됐어. 내가 왜 페퍼소리를 총소리로 듣게 되었는지 그때 알게됐어.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화약 터지는 소리는 비슷비슷하니까.

     

    군대 제대 후 일이야. 어느 날, 비가 많이 오고 천둥벼락이 치는 날이었어. 울엄니가 말야 유난히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거야. 문득 생각해보니 울엄닌 예전부터 유독 벼락만 치면 우리보고 빨리 들어오라 성화에다 집안 문단속에 느닷없이 두꺼운 겨울이불을 꺼내셨더랬지. 

     

    추위를 잘 타시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머리가 좀 크고 시간이 흘러보니 그게 예사롭게 보이진 않더라구. 울엄니, 여장부 스타일에 지금도 자식들한테나 누구한테 기 안 죽는 분이신데. 그런 행동은 유별나다 싶더라구. 그냥 무서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벌벌 떠시니 말야.

     

     

    광주의 상처와 희생은 부상자나 돌아가신 분에게만 한정되는 게 아닌 것 같아. 울엄니와 같이 지금도 맘 속에 응어리진 한이 남아 있는 분들이 많을 거라구. 듣고도 보고도 입 없는 사람처럼 가슴앓이 해야했던 그날, 5월 광주 시민들에게 전두환 신군부가 준 상처와 죄악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워.

     

    왜 광주에서 전두환 찢어 죽어야 한다고 하는지 알고 싶으면, 망월동에 가보길 권해. 당시 사진들과 돌아가신 분들의 묘역과 그 후 광주의 아들딸을 자처했던 민주열사들을 살면서 한번은 보고 가길 권해.

     

    그 담엔, 굳이 다시 찾지 않아도 좋아. 그 슬픔과 정신을 담고 각자 생활공간에서 열심히 살아줘. 어디서 무엇을 해도 좋아.

     

    해마다 5월 광주에 와 묵념하고 기리지 않더라도 그날 쓰러져 갔던 사람들의 정신을 기억해 줬으면 해. 80년의 그분들을 닮은 주변의 약자의 삶에 대해서도 작은 관심을 가져주면 더더욱 좋고.

     

    그러면 돼. 거창한 거 아니여도 돼. 그 정도라도 해주면, 난 그게 오월정신 계승이라고 봐.

     

     

     

    경제 브리핑 7: 디플레이션적 크레딧 사이클 上

    경제 브리핑 7: 디플레이션적 크레딧 사이클 上


                크레딧 사이클은 시작에서 끝까지 약 12년 정도가 소요된다. 디플레이션적 크레딧 사이클은 약 7단계로 나눌 수 있고, 인플레이션적 크레딧 사이클은 5단계로 나눌 수...

     

     

     

     

     

     

    크레딧 사이클은 시작에서 끝까지 약 12년 정도가 소요된다. 디플레이션적 크레딧 사이클은 약 7단계로 나눌 수 있고, 인플레이션적 크레딧 사이클은 5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 4단계까지는 거의 비슷한 흐름으로 전개된다.

     

    본격적인 크레딧 사이클의 각 단계를 하나씩 다루기에 앞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자.

     

    첫째. 크레딧 사이클은 연속해서 발생한다.

     

    하나의 크레딧 사이클이 끝나면 다음 크레딧 사이클의 시작된다는 것이다. 한 크레딧 사이클이 12년 정도가 걸린다고 했으니,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세 번 정도 개최되면 한 크레딧 사이클이 완전히 끝나고, 다음 크레딧 사이클로 넘어가는 것이다.

     

     

    둘째. 크레딧 사이클도 패턴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 있다.

     

    이는 여러 개의 크레딧 사이클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초장기 크레딧 사이클이 만들어질 때다. 본격적으로 공장에 기계가 도입되고 독과점으로 인해 부의 양극화가 극심했던 1920년대 대공황이 대표적인 사례로, 이때는 일반적인 크레딧 사이클보다 훨씬 더 큰 낙차로 심하게 경제가 나빠진다.

     

    후술하겠지만 일반적인 크레딧 사이클에선 정부 및 중앙 은행이 개입하면서 경제가 자연스레 회복하기 마련이지만, 이러한 초장기 사이클에서는 일반적인 부양책이 당최 먹히질 않다. 경제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끝없이 추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에서는 전형적인 크레딧 사이클을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여기선 이런 초장기 사이클도 있다는 걸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다.

     

     

    셋째. 이 글의 목표는 전형적인 크레딧 사이클을 규정하고 그 패턴을 분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나라의 크레딧 사이클은 개별적이다. 크레딧 사이클이 12년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반드시 12년마다 발생한다는 것도 아니고 똑같이 전개된다는 것도 아니다. 각 국가가 처한 경제적 상황과 정책 입안자들이 취한 대응에 따라, 경제위기가 언제 어떻게 발생하고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하나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이건 자연과학이 아니다), 현재 경제 상황이 사이클의 어느 정도에 해당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도구 정도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이제 디플레이션적 크레딧 사이클의 7단계를 알아보자.

     

     

    1단계 (초기 단계)

     

    초기 단계는 이전 크레딧 사이클의 끝과 새로운 버블기의 사이에 낀 짧은 시간이다. 이 단계에서의 경제는 회복기, 정상화 단계를 벗어나(부채가 감소한다) 부채가 다시 늘어나지만, 늘어나는 속도가 버블기에 비하면 완만한 데다가 소득이 부채보다 빠르게 증가한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부채가 단순히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빌린 돈이 어떻게 쓰이느냐의 문제다. 부채는 결국 미래에 갚아야 할 돈이고, 부채보다 소득이 빠르게 늘어난다는 것은 채무자가 미래에 돈을 갚을 능력이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빌린 돈이 생산적으로 잘 쓰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초기 단계에서 정부와 기업들은 아직 지난 크레딧 사이클의 여파 때문에 부채 비율이 낮은 편이라 돈을 빌릴 여력이 충분하며 부채를 사용했을 경우 바로 소득을 늘릴 수 있는 기회 역시 많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약 1년), 이 초기 단계에서 거시 경제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안정적인 상태다.

     

     

     

    2단계 (버블기)

     

    본격적으로 자산 가격이 오르는 시기다. 초기 단계에서 개인, 기업들의 소득이 올라 경기전망은 밝아진 반면, 지난 사이클 때 낮춰둔 금리(경기가 한창 나쁠 때 중앙은행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낮춰 둔 기준 금리가 버블을 형성)는 계속 낮게 유지되고 있어 이자 비용은 아직 낮다. 전망은 좋고 돈 빌리기는 쉽다보니(기준 금리가 낮고 유동성도 충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선뜻 돈을 빌려 자산 구입에 나선다.

     

    부채가 일단 늘어나지만 이 빌린 돈이 대부분 자산 구입으로 몰리기 때문에, 자산 가격이 더욱 빠르게 상승한다. 이 시기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많은 대출을 받아 자산을 구입한 사람들의 순자산(부채를 제외한 자산)이 크게 증가한다.

     

    여기서부터 버블은 새로운 생명력을 갖는다. 최초 자산 가격이 오를 때는 그럴만한 이유(경기 전망은 좋은데 이자 비용은 낮은 상태)가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투기 심리가 개입되면서 자산 가격의 상승 수준과 속도를 더욱 끌어올린다. 먼저 대출을 받아 돈을 번 사람들은 순자산이 증가했기 때문에 추가 대출을 받기가 쉬워져 베팅을 늘리고, 돈을 벌지 못했던 사람들도 돈 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매수에 나선다.

     

    이러한 버블 중에도 소득은 꾸준히 증가하지만 부채보다는 느리다. 초기 단계에서 이미 쉽게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자산은 고갈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아있더라도 자산의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서 버는 돈에 비해 많은 부채를 짊어져야 한다. 

     

    편의점 창업을 예로 들어 보자. 상권이 형성되기 이전에 좋은 목에 일찍 창업을 한 사람은 쉽게 돈을 벌 수 있지만, 편의점이 이미 많이 있는 상태에서 창업을 할 경우 기존 편의점에 권리금을 줘야 하기 때문에 비용은 더 올라가지만 경쟁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경제가 버블기인지를 판단하는 것을 돕기 위해 레이 달리오는 버블기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7가지로 정리하였다.

     

    1. 기존 방식으로 평가했을 때 자산 가격이 매우 높은 수준이다.

     

    2. 현재의 가격이(이미 현재 수준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미래에 추가적인 고성장이 있을 것을 전제하여 매겨졌다.

     

    3. 전반적으로 상승장 지속에 대한 기대가 높다.

     

    4. 많은 레버리지(자기 자본은 적고 빌린 돈의 비율이 높은 것)를 낀 자산 구입이 이뤄진다.

     

    5. 구매자들이 미래의 추가 가격 상승을 기대, 대비하기 위해 구매를 앞당긴다.

     

    6. 기존에는 투자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자산 구입에 관심을 보이고 시장에 등장한다.

     

    7. 경기 부양책이 추가적으로 버블을 불어넣는다.

     

    레이 달리오에 따르면, 지난 2007년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직전 미국은 위의 7가지 항목에 모두 해당이 되었다. 참고로 IMF이전 우리나라(1994년)의 경우에도 1번부터 5번까지가 모두 해당되었다.

     

     

    3단계 (고점 형성기)

     

    오랜 상승장 끝에 빚을 내서 자산을 매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더이상 가격이 오를 수 없게 되는 지점이다. 고점 형성기는 버블기의 끝물이고 본격적인 조정(하락장) 직전에 찾아오는 짧은 시기다.

     

    자산 상승이 멈추고 고점이 생기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보통은 버블 지속을 우려한 중앙은행이 기준 금리를 올리고 시중에 지나치게 풀린 돈을 회수함에 따라 고점이 형성되고 가격이 깎인다. 이렇게 중앙은행이 개입해서 버블을 꺼뜨리지 않더라도 기업이나 국가가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최대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치에 도달함에 따라 버블이 스스로 사그라들기도 한다.

     

    외부적 요인을 통해 버블이 꺼지기도 하는데,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 같은 것이 발생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갑자기 투자금을 회수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최악의 경우는 일본인 투자자에게 돈을 빌려 미국에 수출을 하는데, 엔화의 가치는 상승하고 달러는 하락하는 경우다. 갚아야 될 돈의 가치는 원화 대비 높아지는데, 벌어들이는 돈의 가치는 원화 대비 내려가기 때문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버블이 꺼지고 자산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빚을 내서 투자를 한 사람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투자를 통해 구입한 자산의 값어치는 떨어지는데 갚아야 할 이자와 원금은 변하지 않는다. 당장 가장 많은 희망을 가지고 가장 많은 빚을 내서 무리하게 자산을 구입한 사람부터 가장 큰 손실을 입는다.

     

    이렇게 손실이 발생하고 담보물의 값어치가 하락하면 대출자들은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버블기에는 돈을 빌려주고 싶어 먼저 영업을 하던 은행들도 돈을 빌려주기 꺼려하고 신규 대출자들에 대한 심사가 대폭 강화된다.

     

    따라서 고점 형성기 초기에는 단기 금리와 장기 금리의 차이가 거의 없어진다. 보통 장기 대출을 해줄 땐 장기간 돈이 묶이는 데에 대한 보상으로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한다. 하지만 조만간 불황이 찾아올 것으로 예상되면 신규 대출 자체가 드물어지는 데다가, 돈을 빌려주더라도 채무자의 신용도가 훨씬 중요해져서 장기 금리에 대한 프리미엄이 거의 사라지는 것이다. 경제 위기의 전조로 찾아온다는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대출 시장에 조금씩 문제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고점 형성기 초반에는 경제 상황 전반은 괜찮은 편이다. 이 시기에 은행은 조금씩 경계를 하고 중앙은행에서는 경제 성장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지만, 일단은 경제 활동과 소비 활동이 왕성하고 실업률도 낮은 편이다. 고점이 형성되고 본격적으로 불황이 찾아오기 반년 전 쯤에 가장 빠른 속도로 이렇게 돈줄을 죄고 현금을 모으려는 움직임이 잘 포착된다.

     

    자산 가격이 꺾이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불황이 시작된다. 고점 형성기 후반으로 갈수록 중앙은행의 통화정책(돈을 풀고 죄는)보다 자산 가격의 변동이 점차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자산 가격 하락은 소득 감소를 촉진시키고, 담보물 가치 하락과 소득 감소의 콤보는 기업과 개인의 신용도를 가파르게 떨어뜨린다. 소위 말하는 펀더멘털이 맛이 가면서 본격적인 불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국방개혁 30년, 그 기나긴 여정 4: 미 통합군의 성공적 데뷔

    국방개혁 30년, 그 기나긴 여정 4: 미 통합군의 성공적 데뷔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의 핵심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통합군 창설”   이었다....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의 핵심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통합군 창설”

     

    이었다. 이 법으로 인해 만들어진 게 바로 지금의 미국 통합군 시스템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국은 이런 형태의 군대운용법을 보여줬다. 2차 대전 당시에 태평양을 둘로 쪼개 니미츠와 맥아더에게 맡긴 게 대표적인 예.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됐을 무렵에는 전 세계를 여러 조각으로 쪼갠 뒤에 하나씩 던져(?) 줬다.

     

    “넌 태평양 맡고, 넌 대서양... 그래, 넌 카리브해 맡아 알았지?”

     

    “저는요?”

     

    “넌 유럽 맡아.”

     

    냉전시절 미국은 극동사령부(Far East Command), 태평양사령부(Pacific Command), 알래스카사령부(Alaskan Command), 동북사령부(Northeast Command), 대서양사령부(Atlantic Command), 카리브해사령부(Caribbean Command), 유럽사령부(European Command) 등등을 만들어서 합동참모본부 직속으로 운영했었다(정말 미국의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전 지구를 작전 대상으로 놓고, 병력을 쪼개 배치시키고, 전쟁을 준비한다니).

     

     

    문제는 이 당시 사령부의 느낌이란 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군구(Military district)제를 펼쳤다.”

     

    라는 느낌이다. 여기서 군구(Military district)란, 어떤 한 지역에 군을 배치했을 때 해당 군대에게 그 지역에서의 주둔이나 활동에 있어서의 ‘독립적 권한’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권한’이란 군사작전에 관한 권한인 군령권이 아니라, 주둔하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권한. 즉, 군정권이다.

     

    (만약 군령권을 해당 군구사령관에게 준다면, 이건 중세시절의 영주나 다름이 없다. 문민통제가 일반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군구사령관에게 독자적인 작전권을 준다면...)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은 이때까지 합참 직속으로 돼 있었던 지역별 사령부를 국방부 직속으로 옮기고, 조직의 효율화를 위해서 필요 없는 사령부를 해체하거나 통폐합했다.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에 의해 국방 예산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강화됐다. “국가안보를 위한 예산이다.”라며, 비밀주의와 말도 안 되는 납품가로 혈세를 낭비하던 국방부의 고삐를 확실히 틀어쥐었다.)

     

    겉으로만 보면, ‘이름’만 바꾸고, 문민통제를 강화하고(의회통제), 조직개편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착각이다(물론,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1986년에 발의된 이 법안의 진정한 ‘힘’은 통합군 사령관에 대한 ‘법적인 지위’를 보장한 164조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주요 내용을 발췌해 보겠다.

    통합군 전투 사령관의 임명, 권한, 의무(164조)

     

    - 통합군 사령관의 지휘권은 대통령이나 국방 장관의 별도 지시가 없는  지휘관으로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배속된 부대의 작전, 합동 훈련, 군수 지원 준비를 포함한 제반 지시, 통제, 지휘권을 직접 행사한다.

     

    - 통합군 사령관은 주어진 임무 수행에 필요한 부대와 필요한 자원을 요구할  있다.

     

    - 통합군 사령관은 임무 수행에 필요한 부대 편성, 훈련, 필요 자원의 요구, 군기 유지를 위한 행정적 지시를 집행할  있다.

     

    - 통합군 사령관은 예하 배속 부대 지휘관, 참모, 지정된 부대를 훈련시킬 권한이 있으며 필요시 군법 회의를 소집할  있다.

     

    - 통합군 사령관은 언제든지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 지침, 통제 권한이 임무 수행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수시로 국방장관에게 알리고 보완을 요구할  있다.

     

    - 통합군 사령부에 예속, 배속된 사령부와 부대의 지휘관들은 통합군 사령관의 권한, 지시, 통제에 순응해야 하며 통합군 내의  사령부와 부대와 적극적이고 유기적인 협조와 소통을 유지해야 한다.

     

    - 통합군 사령부의 주요한 직속 예하 사령부의 사령관을 선정할 때에는 통합군 사령관이 동의한 지휘관이어야 하고 국방 장관은 대상 지휘관이 특별히 국가의 이익에 부합한 자를 제외하고는 통합군 사령관의 동의하에 임명 절차를 밟아 임명하여야 한다.

     

    - 통합군 사령관은 예하 전투 사령관들의 근무 평가서를 작성하여 각군 장관과 합참 의장에게 제출할 권한을 가진다.

     

    - 통합 전투 사령부는 사령관을 보좌할 참모를  군의 유능한 장교를 선발하여 임명하며 중요 직위는 대통령이 임명하되 국방장관이 통합군 사령관의 동의를 참고하여 국익에 도움이 되는 자를 선발하여야 한다.

     

    어떤가? 통합군 사령관의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가? 통합군에 소속된 육, 해, 공, 해병대의 지휘권 보장은 물론이거니와 작전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요청은 물론이거니와 인사권과 처벌권(군법회의)까지 가지고 있다. 통합군 사령관의 지휘권과 작전권을 최대한 보장해 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어지는 법 조항을 보면, 당시 미 의회가 통합군을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대한 생각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통합전투 사령부 행정지원 조항(165)

     

    - 국방 장관은 합참의장의 자문과 지원을 받아 통합군 사령부에 제공할 행정  지원 대책을 강구하며  군의 장관들은  법령 지시에 의거 통합군 사령관에게 예속된 소속 군의 사령부와 부대가 고유의 전투 기능을 발휘할  있도록 행정  지원을 수행할 책임을 진다. 국방 장관은 각군 장관들과 상의하여 통합군 사령부에 예속되는 부대가 가지고 있던 행정과 지원 임무를  부대와 기관에 이관함으로써 통합군 전투 임무에 전념할  있도록 한다.

     

    통합전투 사령부 예산 조항 (166)

     

    - 국방 장관은 국방 예산 편성  통합군 사령부의 예산을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편성하여 의회에 상정하여  통합군 사령부가 합동 훈련, 부대 훈련, 우발 대비, 주어진 작전 수행을 준비할  있게 하고 독립적인 군법회의를 운용할  있는 예산을 확보하게 한다.

     

    통합군은 말 그대로 육, 해, 공, 해병대의 모든 군이 모여 있는 군대다. 이 군대의 지휘권을 명확히 하고, 독립성을 유지시켜주기 위해 예산도 따로 책정해 준 거다.

     

     

    당시 미 의회 의원들은 이때까지 보여준 실패와(베트남전, 이란 대사관 인질 구출작전, 그레나다 침공 등등) 앞으로의 전쟁을 생각해 특단의 대책을 내놓은 거였다.

     

    “겉으로만 통합군이네, 지역사령부네 하는데 이제까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미군은 군구(Military district) 사령부에 불과했다. 우리는 관리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쟁을 할 사령관과 군대가 필요하다.”

     

    이렇게 6개의 통합 전투 사령부와 3개의 기능전투 사령부(전략사령부, 수송사령부, 특전사령부)로 개편된 미군은 곧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게 된다(이후 통합군 사령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점 늘어나게 된다).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파나마 침공작전에서 깔끔한 데뷔전을 치른 미군은 곧이어 터진 걸프전에서 ‘통합군’의 제대로 된 면모를 보여줬다.

     

    이 당시 중부군사령부의 사령관은 노먼 슈워츠코프(Herbert Norman Schwarzkopf. Jr) 대장이었다. 개인적인 평가지만, ‘통합군 사령관’의 지위와 권한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직후 펼쳐진 사막의 방패 작전. 이 작전 기간 동안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꾸역꾸역 병력을 밀어 넣었다. 중부군 사령부는 가지고 있던 작전계획 90-1002로 인터널 룩(Internal Look)이라 불리는 사령부 수준의 워 게임을 돌렸는데, 미군이 패배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 즈음에 워싱턴 정가에서는(구체적으로 아버지 부시 대통령),

     

    “10월 중으로 우리가 이라크에 쳐들어갈 것이다.”

     

    라는 희망 섞인 관측(관측이라고 읽고 압박이라고 읽는다)을 언론에 흘리면서 전쟁 승리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당시 중부군 사령부가 확보한 병력은 공군과 해군 병력을 포함해서 18만명 수준이었다. 슬슬 전방에 배치한 병력에 대한 순환 근무계획을 짜는 상황에서 ‘이라크 공격’을 감행하라는 우회적인 압박에 슈워츠코프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보였고, 워싱턴은 슈워츠코프를 달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어봤다. 이때 슈워츠코프의 대답이 걸작인데,

     

    “7군단을 주십시오.”

     

    이 당시 슈워츠코프에게 배속돼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했던 부대가 18공수군단이다(분쟁지역에 제일 먼저 급파되던 부대다. 최초 이라크에 파병된 부대가 공군의 F-15편대와 82공정사단 1진 병력 2천3백명이다. 드라마 밴드오브 브라더스의 101공수사단과 듀엣으로 등장하던 게 82공정사단이다).

     

    18공수군단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언제나 등장하는 부대이지만, 7군단은 이야기가 다르다. 불과 1년 전 만 해도 이런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제7군단은 미국의 유럽방위에 있어서 핵심이었다. 냉전이 한참이던 시절에 바르샤바 조약군의 탱크 러시를 전면에서 받아내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게 7군단이다. 이 임무에 걸맞게 2개 기갑사단, 1개 기계화 보병 사단으로 구성돼 있었고, 이 당시에 보기 드물게 ‘완편’으로 편제돼 있던 최정예 군단이었다.

     

    통합군 사령관은 주어진 임무 수행에 필요한 부대와 필요한 자원을 요구할  있다.”

     

    라는 법조항을 기억하는가? 슈워츠코프는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고, 워싱턴에서는 슈워츠코프의 요구를 들어준다. 아니, 그 이상으로 부대를 보낸다.

     

    유럽에 있던 7군단을 그대로 뽑아내 사우디로 보냈고(말 그대로 7군단을 그대로 보내줬다), 덤으로 1개 해병사단에 육군 제1 보병사단, 해군의 항공모함 전단 3개, 그리고 공군 전술기 400여대까지 미군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슈워츠코프에게 건넸다.

     

    여기서 빛을 발한 게 수송사령부다. 병력이 아무리 많더라도 이걸 사우디아라비아로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 본토에서 사우디아라비아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만으로도 1만1천 킬로미터에 달했다. 수송사령부는 10분에 한 대꼴로 C-5와 C-141을 착륙시키는 비율로 1990년 8월 말까지 7만 2천의 병력과 10만 톤의 물자를 실어 날랐다. 이후 증파되는 병력과 급증하는 보급수요를 맞추기 위해 민간 항공기를 징발해 보급품 수송에 투입했다(베트남전 때도 민간 항공기를 징발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한다면, 당시 미국이 어떤 마음으로 전쟁을 준비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걸프전은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 의 성과를 보여주는 시험대였고, 미군은 훌륭하게 이 시험을 통과했다.

     

     

     

    한국경제 거덜난다? : 마이너스 성장과 환율 폭등의 이면

    한국경제 거덜난다? : 마이너스 성장과 환율 폭등의 이면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인 경제 뉴스가 많이 유통되고 있다.     '미국이 3.2% 성장할 동안 한국은 -0.3% 성장했다.'    '원화 가치가 후진국보다 빠르게 폭락중이다'    와 같은...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인 경제 뉴스가 많이 유통되고 있다. 

     

     '미국이 3.2% 성장할 동안 한국은 -0.3% 성장했다.'

     

     '원화 가치가 후진국보다 빠르게 폭락중이다' 

     

    와 같은 얘기들이다. '사실'로 보이는 이 이야기을 제대로 이해해 '진실'을 들춰보기 위해선 그 맥락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경제 거덜 난다?

     

    출처 -

     

    미국과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단순 비교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GDP를 계산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미국은 분기 경제성장률을 연율로 환산해 표기한다. 미국 경제는 연간으로 쳤을 때 3.2% 정도 성장했다는 거고, 우리나라 방식으로 치면 0.8%(정확히는 0.76%) 성장한 셈이다. 미국(0.8%) VS 한국(-0.3%)라고 하면 극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언론은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비교를 반복한다.

     

    물론 미국이 깜짝 성장을 할 동안 한국이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는 근본적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수치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장 간단한 해석은 미국 경제와 한국 경제를 단순 비교해 보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경제 중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는 건 투자와 수출이다. 미국에서는 1분기에 투자와 수출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고유가와 무역 갈등의 영향 때문이다.

     

    미국은 최근 몇 년간 셰일 가스 개발 등을 통해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되었다. 원유 수출 부분에서도 사우디, 러시아에 이은 세계 3위권 국가이다. 해서 미국은 1분기 유가 상승(베네수엘라 사태 악화, 이란 경제 제재)에 따른 수출액 증가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올해부터 대중 수입품 관세 인상이 본격화되었는데, 이를 인지하고 있었던 미국 기업들은 관세 인상에 앞서 재고를 비축해 둔 상태였다. 자연히 1분기 수입액이 줄어든 것이다.

     

    반면 한국은 대중 수출에 의존하고 있고, 그 수출또한 반도체와 자동차에 집중되어 있다. 경제 구조 자체가 미중 무역갈등에 취약했고, 반도체 가격 하락에 직격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란 것이다. 이런 악재로 수출은 감소했고, 그에 따라 설비 투자도 감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 1분기에는 신규 사업 추진 등으로 정비 지출이 큰 폭으로 감소하기까지 했다.

     

    언론이 제대로 일을 하려 했다면, 3.2% vs 0.3%의 수치로 불안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이 차이를 설명하고 우리의 경제 구조에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까지 쓰고 보니, 한국 언론에 이런 걸 기대할 수 있을까 싶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마음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환율도 비슷한 상황이다. 미국이 깜짝 성장을 한데다가 금리 또한 우리나라보다 높게 쳐주기 때문에 원화가 악하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거기에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강경하게 돌아서 북한 리스크까지 작용했다.

     

    극우 유튜버들은 신났다

     

     

    지표 이면을 들춰보자 

     

    올해 1분기의 마이너스 성장과 환율 하락의 이면에는 이러한 맥락들이 존재했다. 일각에선 나라가 망했다는 둥, 경제를 말아먹었다는 둥 하지만, 경제가 크게 나빠졌다고 단정 지을 요소는 없다. 분기 경제성장률이나 환율은 2, 3분기에 반등할 여지가 충분하다(환율은 북한 리스크를 많이 탈 것 같고, 경제성장률은 예산 진행에 따라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진짜 문제는 분기 지표 하나가 나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적 구조가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고, 그 앞에 놓인 현실 또한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황xx, 나xx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는 현 정권의 경제 정책 때문은 아니고 최저임금 인상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지난 수년에 거쳐 한국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게 우위를 내어준 상태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있고 중국이 잘 치고 나간 것도 있지만 이렇게 시장 규모도 작은 제조업 중심 국가가 여러 산업에서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게 원래 힘든 일이다.

     

     

    우리가 경쟁력이 있는 산업(치열한 치킨 게임 속에서 규모를 통해 살아남았다)이라면 반도체 정도였는데, 반도체 산업이 조정기에 들어가면서 수출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최근 조선, 자동차 산업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있어 다행이지만, 나머지 산업의 전망이 어둡다. 수출이 특정 산업에 몰려 있다 보니 경기에 따라 수치가 크게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라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요인 중 다른 하나인 투자 쪽을 살펴봐도 앞으로 크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는 R&D 지출 상위권인 국가다. GDP 대비로 보면 최상위권이고 절대액수로도 상위권이다(설비 투자 쪽은 이미 과잉에 가깝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걸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당장 과학 분야 노벨상 한국인 수상 명단을 보라), R&D 비용 대부분이 개발 연구 쪽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가 되는 기초 연구에는 10%대의 돈만 들어간다. 짜내기만 급급하다 보니 당장 돈이 안 되는 기초 분야에 대한 투자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규모가 큰 대기업일수록 매출 대비 R&D 비용을 유지하는 데 인색한데 이걸 좀 삐딱하게 보면 국내 시장에선 독과점으로 꿀을 빨기 때문에 투자 비용을 늘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것이고(자동차 회사가 땅을 사는 데 10조를 쓴다던가), 좀 온정적으로 보면 산업 전체가 국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기에 돈이 갈 곳을 잃은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코스피 상장 기업들의 P/B(시가총액을 장부가격으로 나눈 비율)는 현재 1이 채 되지 않는다. 시장에서 평가하는 우리 기업들의 가치가(시가총액) 지금까지 들인 돈(장부가치)보다 낮다는 것이다. 이 경우 돈을 버는 족족 재투자하지 않고, 현금으로 쌓아두는 회사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가치평가를 받게 된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하는 투자를, 시장에서는 돈값을 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대외 여건도 상당히 좋지못하다. 미국은 홀로 호황을 누리고있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 기준금리를 가파르게 올랐다. 이미 미국금리가 더 높은상황에서, 여기서 우리만 금리를 낮춰서 경제성장을 도모하기란 매우 어렵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쓸 수있는 카드(통화정책)가 제한된 상황이다. 

     

    보통은 이렇게 미국이 잘나가고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을 통해서 활로를 모색할 법한데(환율이 떨어지면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에), 미국은 더 이상 다른 나라에 돈을 잃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각국의 무역분쟁은, 결국 무역흑자를 통해 다른 부분을 메우려는 우리 같은 나라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들이다.

     

    이러한 얘기들이 어제오늘의 문제만은 결코 아니다. 사실 IMF를 기점으로 한국의 경제는 고성장에서 현상 유지로 방향을 잡았었는데 밑에선 중국, 베트남이 치고 올라오고 있고, 위에선 미국이 더이상 돈을 잃어주지 않겠다고 하는 통에 이래저래 먹고살기가 막막해진 것이다.

     

    딱히 답도 없고 희망도 없는 만년과장(요즘은 물론 과장은커녕 사원되기도 어려워졌지만)같은 슬픈 얘기지만, 적어도 그걸 가지고 표장사 하려는 정치인들에게 흔들리지는 말자.

     

     

     

     

     

    [산하칼럼]유호 작가 별세에 부쳐 : 역사를 만든 최고의 짝 - 유호와 박시춘 上

    [산하칼럼]유호 작가 별세에 부쳐 : 역사를 만든 최고의 짝 - 유호와 박시춘 上


                며칠 전 한국 방송사의 산 증인이라 할 유호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8세. 거의 한 세기를 채운 그의 삶은 방송작가로서,...

     

     

     

     

     

     

    며칠 전 한국 방송사의 산 증인이라 할 유호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8세. 거의 한 세기를 채운 그의 삶은 방송작가로서, 문필가로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낸 에서 나는 작곡가 박시춘과 콤비를 이룬 작사가 유호의 면모를 들춰 보았다. 그 내용을 줄여 소개하며 고인을 기려본다.

     

     

     

    해방이 왔다.

     

    미군정 치하에서 각계각층의 한국인들은 새로운 나라, 당당한 독립국을 건설하는 노력에 매진한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전파를 쏘았던 조선 경성방송국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이 떠나 버린 방송국을 조선인들이 떠맡아야 했고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 방송을 준비해야 했다. 1945년 10월 편성과장 김진섭은 꽤 재능 있다는 젊은이를 만난다.

     

    “동양극장 미술부와 문예부에서 일했다고?”

     

    “네. 간판하고 포스터를 그리면서 연극을 계속 봤고 대필(代筆)로 두 편 정도 썼습니다.”

     

    “이름이 유호(兪湖)라고? 본명은 아닌 것 같은데.”

     

    “본명은 유해준(海濬)입니다. 유(兪)라는 성에 ‘맑다’라는 뜻이 있어서 맑은 호수라는 뜻으로 필명을 지어 본 겁니다.”

     

    ‘맑은 호수’ 유호는 경성방송국으로 직장을 옮겨 낭독 소설 과 연속극 대본을 쓰면서 우리나라 방송작가 1호로 첫발을 내딛는다. 이후 근 반세기 동안 수백 편의 드라마 대본을 써낸 한국 방송 역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었거니와, 또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이름을 굵고 진하게 남겨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바로 작사가(作詞家)로의 영역이다.

     

     

    작사가의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은 경성방송국 경음악단장으로 있던 박시춘(朴是春, 1913~1996) 때문이었다. 트럼펫부터 아코디언까지 악기들을 오로지 혼자 힘으로 마스터했고  등 공전의 히트곡을 내놓은, ‘가요계의 보물’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았던 인물. 이 박시춘이 유호를 알아보았다.

     

    어느 날 박시춘이 유호를 찾았다. 요청인 즉 “레코드 취입을 하겠다며 곡과 제목을 지어왔으니 거기에 맞춰 여러 곡을 한꺼번에 작사해 달라.”(문화일보 2011년 1월 28일자)는 것이었다. 밀가루 반죽을 넣어 국수 뽑는 기계도 아니고 여러 곡을 단번에 내놓으라니 유호도 어안이 벙벙했을 테지만, 박시춘은 막무가내였다.

     

    “해방도 됐으니, 응? 이제 우리 옛것을 찾아 노래해 보면 어떨까? 응? 그래서 제목을 이렇게 지어봤소. . 한 번 노랫말 써봐요."

     

    “신라면 경주인데... 저는 경주에 수학여행 때 딱 한 번 가봤는데요.”

     

    “뭐 꼭 서울 가봐야 서울 얘기 쓰나. 한번 써봐요.”

     

    수학여행 때 가 본 불국사 정도나 어른거릴 뿐 경주나 신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지식도 없었던 유호의 선택은 ‘여행안내도서’였다. 그걸 뒤적이며  가사는 얼키설키 모양을 갖춰 갔다. 그래서일까 가사가 약간 어색한 부분도 있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 위에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여기서 금오산이 왜 나올까. 토함산이면 몰라도. 물론 경북 구미의 금오산도 신라 땅은 맞겠지만 대구보다 북쪽이고 불국사와도 수백 리 떨어져 있는데. (작가가 이 내용의 농담하며 웃었다는 얘길 사적인 채널을 통해 전해 들어서 적었는데 ' 금오산은 경주 남산의 원래 이름으로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여기서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 지적이 있었다)

     

    가수 현인(왼쪽)과 유호 작가(오른쪽)

     

    이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가수 현인이 부른 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관중들의 엉덩이를 찌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격동시켰다.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듣는 이의 몸도 떨릴 듯한 바이브레이션과 그에 걸맞게 잘생긴 외모 앞에서 관중들은 열광했다.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고 앙코르도 몇 번인지 몰랐다. 무대를 지켜보던 유호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노래란 게 이런 거구나. 가수란 게 이런 거구나. 어쩌면 그 환호와 열광이 유호의 영감에 불을 붙였으리라.

     

    히트 이후 박시춘과 유호는 승승장구했다. 박시춘은 아예 럭키레코드를 차려 사장 명함을 박고 사업을 시작했고, 유호는 경향신문 문화부장과 럭키레코드 문예부장 자리를 동시에 꿰찬다. 그러나 희망으로 부풀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점차 굳어져가던 분단의 대지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화산같이 폭발했다. 수도 서울 사수를 주장하던 정부는 일찌감치 도망쳤고 한강 다리마저 끊었다. 유호는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서울이 함락되던 6월 28일, 이미 인민군들이 한강변으로 진격하고 서울 강북이 온통 인공기가 휘날리던 즈음, 한 국군 병사가 청파동 언덕길로 뛰어올라왔다. 철모도 없고 군복은 흙먼지로 그득한 패잔병. 그러나 총을 든 손은 굳건했고 눈초리는 형형하게 빛났다. 인민군을 향해 총을 쏘려 했지만 총알마저 떨어진 것을 안 병사는 총을 팽개치고 오늘날의 효창공원 쪽으로 사라졌다. 이미 기울어진 전황이었으나 퇴로가 끊긴 병사들은 자신의 마지막 위치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유호는 그 최후의 용사 하나를 목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 세상은 또 다시 바뀌었다. 인천 상륙 작전 후 인민군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9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떨어졌던 날로부터 꼭 석 달 뒤 서울에 다시 태극기가 꽂혔다. 경기도 하남에서 숨어 지내던 유호 역시 나는 듯이 서울로 돌아왔다. 자신이 지었던 럭키 서울의 후렴구를 신나게 불렀을 것이다.

     

    “너도 나도 부르자 사랑의 노래 다 같이 부르자 희망의 노래 S E O U L S E O U L 럭키 서울~”

     

    전쟁 전 살던 동네인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국군 해병대가 기민하게 이동하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석 달 전 남루한 복색의, 그러나 결코 굴하지 않았던 국군 병사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리라. 근무지였던 경향신문에 나가 보니 '문화부 기자는 당장 할 일이 없으니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간만에 자유롭게 명동 거리를 거닐던 유호 앞에 갑자기 나타난 밀짚모자의 사나이가 있었다.

     

    “유형 무사했구만!”

     

    박시춘이었다. 시골에 피난 갔다가 돌아온 그 역시 예술가들이 즐겨 모여들었던 명동 거리가 그리워서 식구들을 집에 데려다 놓자마자 뛰쳐나왔던 것이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술집을 찾았다. 전쟁통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반가웠던 작사가와 작곡가는 연신 건배하며 술을 들이켰고 술자리는 박시춘의 집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2차’ 자리에서 유호 박시춘 콤비는 또 하나의 즉흥곡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제 살았고... UN군이 북진을 한다니 통일도 이젠 멀지 않은 것 같소. 국군도 38선 돌파해서 북으로 올라가겠지. 우리 군인들 사기를 높일 노래 하나 만듭시다.”

     

     

    박시춘의 제안이었다. 이미 유호의 머리 속에도 여러 풍경들이 엇갈리며 번져가고 있었다. 서울 함락되던 날의 패잔병,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 내팽개쳐진 총, 서울 수복 후 환희에 차서 서울 시내로 쏟아져 들어오던 해병대. 가사 한 줄을 읊으면 박시춘은 기타를 튕기며 곡을 만들었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던 박시춘은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던 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전쟁터를 경험한 병사의 독백보다 더 생생하고 전투현장을 목격한 진중 시인의 노래보다도 더 절절한 가사가 박시춘의 정교한 손놀림이 튕기는 멜로디에 부드럽게 실렸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2절)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모습이 꽃같이 별같이.(3절)"

     

    유호는 4절까지의 가사를 거미가 실 뽑아내듯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토해냈고, 박시춘은 가사를 노래에 맞게 조율했다.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노래는 국군 측에 전달됐고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지리산 등에서 국군과 경찰을 괴롭히던 빨치산들까지도 이 노래의 가사를 바꿔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다음에 계속...

     

     

     

     

     

     

    거의 완전한 슈퍼히어로 통사 5 : 빅뱅과 골든 에이지 - 정치적 목적의 슈퍼히어로

    거의 완전한 슈퍼히어로 통사 5 : 빅뱅과 골든 에이지 - 정치적 목적의 슈퍼히어로


          0. 대공황의 미국 어딘가에서 1. 이슈, 볼륨, 코믹스 2. 빅뱅과 골든 에이지 : 2차대전 3. 냉전과 실버 에이지 : 냉전, SF, 민권 운동, 베트남전 4. 중간기 혹은 브론즈 에이지 :...

     

     

     

    0. 대공황의 미국 어딘가에서

    1. 이슈, 볼륨, 코믹스

    2. 빅뱅과 골든 에이지 : 2차대전

    3. 냉전과 실버 에이지 : 냉전, SF, 민권 운동, 베트남전

    4. 중간기 혹은 브론즈 에이지 : 오리엔탈리즘, 탄압에서의 탈출, 안티 히어로

    5. 모던 에이지 혹은 현재 : 영상화, 시빌 워, 9.11테러, 애국법, 소수자

    6. 누구보다 빠른

     

     

     

    2. 빅뱅과 골든 에이지 (4)

     

    준비된 2차대전용 문화산업

     

    미국 사회가 대공황의 터널을 거의 다 통과한 1941년. 연말을 향해 가던 12월 7일에 일본 제국은 미국의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를 공습했다. 선전포고문이 사전에 송신되긴 했지만, 난해한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어 미국으로선 ‘해독’을 해야 했다. 미국이 알아먹을 수 없는 난문(難文)의 내용이 선전포고임을 이해하기는커녕 전달받기도 전에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이는 선전포고 없는 기습 공격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 선전포고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얽혀있다. 5000자가 넘는 장문의 선언문 문서는 총 14장이었고 마지막 장은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적혀 있었는데, 선전포고의 내용은 이 마지막에 들어가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단어는 하나도 적혀있지 않아 굉장히 심도 깊게 읽지 않으면 선전포고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문서는 암호화되어 주미일본대사관으로 보내졌고, 이를 해독해서 타자하여 대사가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달했던 시각은 진주만 공습 시작 후 20분이 지난 때였다. 당시 대사관의 타자기를 담당한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었는데, 기밀문서라는 이유로 대사관은 외국인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자국인 직원들로만 수신 및 출력 작업을 했다. 그나마도 전근 가는 직원의 송별 파티를 하느라 많은 직원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타자기에 익숙지 않은 1등 서기관이 독수리 타법으로 토닥토닥 적어야 했다.

     

    당시 일본 해군의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태평양 전쟁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해서는 안 될 전쟁이 결의되자 그래도 직업이 직업인지라 진주만 공습 작전을 입안했고, 이를 성공시켰던 비운의 유능한 제독이다. 이소로쿠는 진주만 공습을 지휘할 때 선전포고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작전 이후에야 간신히 미국에 전달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예정대로 전해졌다 하더라도 전달 예정 시각은 작전 결행 20분 전이었다. 당연히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하고, 의미를 꼬아놓은 문장을 이해하고, 마지막 장에 숨겨둔 선전포고 내용을 이해하고, 선전포고 소식을 진주만에 전달하기까지 20분이라는 시간은 말도 안 되는 시간이다. 상대가 최대한 늦게 해석해 대응 또한 늦도록 애쓴 것이다. 마지막 문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제국 정부는 여기에 합중국 정부의 태도로 미루어 금후 교섭을 계속할지라도 타결에 이를 수 없다고 인정치 않을 수 없음에 관하여 합중국 정부에 통고함을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이런 엉망진창의 선전포고문이 그나마도 늦게 전달되었음을 알게 된 이소로쿠 제독은 격노했다고 한다. 이소로쿠의 격노는 미국의 격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주만 초토화의 보고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가 일본이 들고 온 상식 밖의 꼼수를 목도한 국무장관은 일본 대사를 내쫓았다. 미국 전역이 국무장관의 분노를 공유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치욕의 날 연설 Day of Infamy Speech를 하고 2차대전에 참전했다. 미국인들의 자진 입대율은 90%에 육박했다.

     

     

    양측이 맞붙는 전장은 당연히 사이에 있는 태평양. 넓고 넓어서 태평(太平)이 붙은 바다다. 해군과 공군 전력이 필수인데 해군과 공군의 전력은 공장에서 나온다. 미국은 뉴딜 정책으로 인해 간신히 소생한 공장들로 배와 전투기를 생산했다. 그 생산력의 규모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2차대전 당시 영국이 생산하거나 타국에서 지원받거나 수입한 수송선을 다 합치면 1500만여 톤 정도다. 미국은 혼자서 2500만여 톤의 수송선을 생산해냈다. 수송선만 이런 정도다. 이소로쿠 제독의 걱정은 옳았다. 일본은 미국의 상대가 아니었다.

     

    태평양은 넓고 기항지로 쓸 섬도 적다. 미국이 낸 답은 항공모함 위주의 전력 구성이었다. 항공모함은 배 자체도 거대하고 그 위에 올릴 비행기까지 고려하면 막대한 생산력이 필요하다. 그 생산력을 충당하기 위해 공장의 일자리가 대규모로 만들어졌다. 입대하지 않은 남성이나 가정에 있던 여성들이 공장을 돌렸다. 임금이 지급되고 가계 경제가 탄탄해졌다. 전쟁의 영향이라고 놓고 보면 이상한 현상이었다.

     

    전쟁은 국가 경제의 입장에서 보면 대재앙이다. 소비자이자 노동자이자 납세자인 사람들을 대량으로 실어날라 전장에 던져넣고 죽도록 내버려 두는 행위다. 하지만 대공황과 뉴딜 막바지에 있었던 미국에게 2차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은 좀 달랐다. 전력에서 병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 해군과 공군 위주의 전쟁이니 인력 공백이 많지 않았다. 또한 생산하는 장비가 배와 전투기 등의 중공업 품목이다. 공장과 연구소가 가동된다. 경제 주체들이 죽어 나가 경제를 박살 내는 전쟁보다는 경제를 강제로나마 활황으로 만드는 전쟁에 조금 더 가까웠다. 뉴딜과 전쟁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미국을 대공황에서 졸업하도록 만들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국가는 단결 총화해야 유리하다. 비록 진주만 공습 때문에 전국이 단합하긴 했지만, 이 단합의 효과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북돋아야만 한다. 이럴 때 문화 산업은 전쟁 프로파간다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당시 40년대 초중반의 미국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한 출판 만화 시장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주류를 형성해가고 있는 수퍼히어로 시장이 있었다. 수퍼히어로가 전쟁 프로파간다에 합류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장르의 특성에서도 수퍼히어로는 전쟁 프로파간다에 쓰이기 유리했다. 주인공과 반동 인물의 대립이 기초 구도이니, 반동 인물의 자리에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이라는 악을 갖다 놓으면 되는 것이다.

     

    반면 전쟁 프로파간다 참여를 수퍼히어로 장르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 국방성의 후원으로 시장의 넓이를 확장하는 기회가 된다. 문화 산업이라는 신생 산업 분야에서도 신생 분야인 출판 만화 중에서도 신생 장르인 수퍼히어로가 미국 전역의 거의 모든 계층에게 가닿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장에 나간 병사들에게,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국채를 사는 투자자들에게. 게다가 참 절묘하게도 이 장르에는 마침 전쟁용으로 쓰기 딱 좋은 캐릭터들이 막 태어나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수퍼히어로가 캡틴 아메리카였다.

     

     

    타임리 빅3의 마지막 멤버, 캡틴 아메리카

     

    1941년 초의 조 사이먼은 막 타임리에 편집자로 입사한 상태였다. 오랜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입사한 첫 직장이었고, 보수도 좋았으니 사기는 높았다. 그래서 친구인 잭 커비를 불러와 작품 하나를 같이 해보자고 꼬드겼다. 사이먼은 자기가 그린 캐릭터 스케치를 보여줬다. 이름은 ‘슈퍼 아메리칸’이었다. 커비와의 의논 후, 사이먼은 이름에서 ‘슈퍼’를 떼냈다. 시장에 차고 넘치는 슈퍼보다는 캡틴이 더 나아 보였다.

     

    이렇게 캡틴 아메리카가 탄생했다. 군의 실험에 참여한 스티브 로저스(Steve Rogers)가 혈청을 주사 받고 슈퍼 솔저로 재탄생한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무기는 덜 공격적으로 보이는 방패로 결정되었고, 코스튬은 성조기를 활용해 만들었다. 배트맨의 사이드킥 로빈이 저연령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을 보고는 버키 Bucky 라는 이름의 소년 사이드킥도 만들었다. 버키의 이름은 사이먼의 고등학교 시절 농구팀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친구의 이름에서 따왔다.

     

    완성된 캐릭터를 본 마틴 굿맨 사장은 캡틴 아메리카의 잠재력을 깨달은 것 같다. 기존 잡지 라인업에 넣는 대신 독자적인 셀프 타이틀을 만들기로 했다. 다른 만화를 추가하지 않고 오직 캡틴 아메리카의 이야기만 실리는 잡지였다. 당시 거의 모든 발행 이슈는 여러 편의 만화를 앤솔로지 형식으로 싣고 있는 ‘잡지’였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부터 솔로 타이틀로 시작했다. 캡틴 아메리카 코믹스 Captain America Comics의 이슈 #1이 1941년 3월호로 처음 출간되었고, 판매는 1940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진주만 공습 1년 전이다.

     

     

    캡틴 아메리카 코믹스 #1의 표지

     

    이 이슈는 한 캐릭터가 한 이슈를 독차지한 시도로서는 최초로 추정된다. 그리고 또한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로서도 최초로 추정된다. 캡틴 아메리카는 친나치 여론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2차대전 참전 이전 시점의 미국에서 무시할 만큼의 비중은 아니었던 친나치 여론은, 비록 참전과 동시에 나치 독일의 선전포고로 인해 쏙 들어가긴 했지만, 당시에는 반전 여론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만화 작가들의 상당수는 유대계였다.

     

    당시 활동하던 유대계 작가들의 이름을 읊어보자. 조 사이먼, 칼 버르고스, 스탠 리, 잭 커비, 제리 시걸, 조 슈스터, 밥 케인, 빌 핑거, 제리 로빈슨 등등이 전부 유대계다. 지금까지 소개 및 언급했던 작가 중에서 빌 에버렛을 제외한 전부다.

     

    미국 이민사에서 유대계는 총 세 번 물결을 형성했다. 이민 초기인 17~18세기에는 이베리아반도 출신이 많았고, 두 번째인 1차대전 당시에는 게르만계가 많았다. 1880년 이후에 세 번째 물결이 들어오는데 이때는 동유럽계가 많았다. 당연히 막 들어온 동유럽 유대계 이민자들은 정치와 경제 양쪽에서 비주류로 분류되었다. 빈민층도 많았으니 사법 행정 서비스에서도 관심의 외곽으로 밀려났다. 게다가 유대계는 ‘백인 중의 흑인’으로 불릴 정도로 백인 중에서 가장 천대받는 차별 인종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후발주자인 동유럽계 유대인들은 가장 자산이 없는 계층이었다.

     

    심지어 유대계 내에서조차도 동유럽계는 혈통 문화상 소수인 비주류였다. 유대계는 고대의 디아스포라 이후 현대에 이르면서, 전승에 의한 혈통 구분으로 분류되고 있다. 서유럽계는 아슈케나짐, 아랍과 중앙아시아의 유대인은 미즈라힘, 유럽과 아랍이 섞여 있던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은 세파르딤이라는 식이다. 이 세 가지 분류가 주류였고 여기에 이란에 근거한 페르시아계, 그리고 에티오피아에 근거한 베타 이스라엘과 같은 ‘유명한 소수’를 합한 것이 주류 유대계의 혈통 구분이다. 동유럽계는 이 주류 분류에서도 밀려나 있다. 주류의 시선에선 잘 보이지도 않던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에 이민을 온 것이다.

     

    사회 시스템 주류에 들어가려는 노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분야에 종사하는 선택은 인기가 높았다. 갱도 그중 하나다. 후일 흑인 계층도 같은 수순을 밟아 마약상과 음악과 스포츠 위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의 유대계들에게 가능했던 분야 중 하나는 문화 산업이었다. 작가는 인기에 좌우되는 인생이어서 하이 리스크이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는 데에 성공하면 하이 리턴인 직종이다. 20세기 유대계 이민자들의 2, 3세대 중 꽤 많은 수가 이 신생 산업 분야에서 바늘구멍을 노렸다. 조 사이먼과 잭 커비 또한 그중 하나였고, 유대계 후발주자로서 당대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한 결과가 나치를 등장시키는 캡틴 아메리카였다.

     

    나치 독일에 대한 비판 여론을 북돋고 2차대전 참전 여론을 응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캡틴 아메리카는, 첫 이슈부터 센세이션을 만들었다. 단숨에 높은 판매고를 올리면서 타임리가 보유한 수퍼히어로 캐릭터 중 인기 상위권으로 데뷔한 것이다. 친나치 여론 또한 이에 반응했다. 유대인 따위가 위대한 게르만인의 제3 제국을 욕하다니! 작가들에 대한 테러 예고가 있었고 이 때문에 경찰 병력이 회사와 작가들의 집을 경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시 뉴욕의 라 구아르디아 시장은 작가들을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회사에겐 아주 좋은 마케팅 기회였다.

     

    캡틴 아메리카는 단숨에 기존의 메이저 캐릭터인 네이머와 휴먼 토치를 능가하게 되었다. #1 이슈는 한 달 동안 10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는 같은 기간 타임지가 올린 판매고를 넘는 수치였다. 심지어는 팬클럽도 생겨났다. 이렇게 타임리를 대표하는 3인방의 라인업, 일명 빅3가 완성되었다.

     

     

    당시 빅3 중에서 현재도 인기와 생명력을 유지하는 캐릭터는 캡틴 아메리카뿐이다.

    휴먼 토치는 생명력을 잃어 다른 캐릭터로 대체되었고, 네이머는 인기를 잃었다.

     

    한 캐릭터로만 한 이슈를 채우려니 문제도 있었다. 사이먼은 커비 혼자서 그림을 그려서는 그 분량을 매달 채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을 펜슬러와 잉커로 참여시켰는데, 커비는 이 처사에 황당해했다고 한다. 마감에 맞춰 분량을 만들려면 어쩔 수 없었으니 사이먼은 보아의 노래가사 같은 말로 커비를 달랬다. “You’re still No. 1.”

     

    잭 커비는 작가진에서 넘버 원이 맞았다. 캡틴 아메리카를 전후해서 커비가 보여준 스타일은 이후 만화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캡틴 아메리카 코믹스 #1 표지에서 그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포즈, 이를 강조하기 위해 쓰인 동작선과 충격파의 활용이다. 소설 삽화의 유전자로 인해 정적인 느낌의 컷이 많았던 만화가 드디어 독자적인 그림 미학을 발전시켜가는 과정이었고 잭 커비는 그 중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성과를 이어받은 일본 만화는 잭 커비 부류의 방식을 추가 발전시켜 오늘날 만화 표현 기법에 이르게 된다.

     

    캡틴 아메리카의 코스튬 또한 유행을 만들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작법을 요약하면 ‘국가의 의인화’다. 이름과 코스튬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가 이런 캐릭터 유형에서 최초는 아니지만, 메가 히트 상품으로서는 처음이다. 따라서 캡틴 아메리카 이후로 등장한 성조기 테마의 수퍼히어로들은 모두 캡틴 아메리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아류 캐릭터 중에서 대표적인 경우가 이름에서부터 성격이 드러나는 스타 스팽글드 키드 Star-Spangeld Kid 와 사이드킥인 스트라입시 Stripsey 다. 국가의 의인화는 수퍼히어로 장르에서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첫 캐릭터인 수퍼맨의 코스튬 배색도 성조기에서 따온 빨강과 파랑의 대비였으니 말이다.

     

     

    수퍼맨의 창조자 제리 시걸이 DC코믹스에서 1941년 10월에 첫 발매한 스타 스팽글드 키드와 스트라입시의 콤비.

    국가 의인화 캐릭터 중 하나이며, 캡틴 아메리카와 셀프 타이틀 시리즈를 갖고 나왔다.

    캡틴 아메리카와 버키의 관계를 역전시켜, 소년 히어로와 성인 사이드킥의 구성을 하고 있다.

    유사품답게 이후 사라져버렸지만, 그 명맥은 1999년에 스타걸이라는 캐릭터에게로 이어졌다.

     

    만화는 성공했지만 조 사이먼은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커리어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대히트를 쳤지만, 그에 대한 회사의 보답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높은 봉급과 업계의 관행 등을 고려해보면,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도 딱히 선택지가 되기 힘들었다. 결국 조 사이먼은 역마살이 낀 유목형 작가답게 다시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때는 캡틴 아메리카의 #10 이슈가 발매된 후인 1942년 1월경이었다. 잭 커비 또한 그와 함께 타임리를 떠났고, 그래서 스탠 리와의 결합은 20년 후로 미뤄졌다.

     

    사이먼이 떠난 후 공석이 된 편집장 자리는 그의 보조였던 스탠 리가 승계했다. 고작 17세의 입사 1년 차였다. 마틴 굿맨은 조카를 임시 편집장으로만 쓸 생각이었지만, 아무도, 심지어는 스탠 리 자신도 예상치 못하게 업무에 대한 천재성이 발휘되었다. 스탠 리는 1945년 징집되어 2차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 편집장 역할을 무난히 해냈다.

     

     

     

     

     

    [문학]달창 나합 이야기 : 달창타령여편내(達唱打鈴輿便來)

    [문학]달창 나합 이야기 : 달창타령여편내(達唱打鈴輿便來)


              강화도에서 나무하고 농사짓고 살던 더벅머리 청년이 갑자기 왕이 됐다. 조선 제 25대 왕 철종이다. 귀양가 있던 왕족의 후예로 왕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는 이였지만 왕통이...

     

     

     

     

     

    강화도에서 나무하고 농사짓고 살던 더벅머리 청년이 갑자기 왕이 됐다. 조선 제 25대 왕 철종이다. 귀양가 있던 왕족의 후예로 왕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는 이였지만 왕통이 끊기면서 어쨌건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꼽힌 것이다. 원래 그는 선왕 헌종과 같은 항렬로 왕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항렬 때문에 후일 대원군이 아니라 그 아들 명복이 왕이 되는 것이다) 안동 김씨들은 밀어부쳤다. “어차피 우리가 맘대로 할 건데 뭐.”

     

    그 시대를 독점적으로 빨아먹었던 적폐는 다름아닌 안동 김씨였다. 이때는 당파가 의미가 없었다. 노론이고 소론이고 남인이고 북인이고 따질 필요가 없이 안동 김씨냐 아니냐, 안동 김씨에 붙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일생을 결정했고 출세의 가도를 규정했다. 

     

    영화 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거니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백성들은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고 탐관오리들을 물리치기 위해 민란을 일으켰고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봉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기 위해 철종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데 그 책임을 맡은 자 역시 안동 김씨 김좌근이었다. 

     

    하지만 삼정의 문란으로 배불리는 것도 안동 김씨였고 탐관오리들에게 뇌물받고 관직을 주는 것도 안동 김씨였으니 고양이에게 어물전 감독을 시킨 셈이었다. 김좌근은 개혁 시늉만 했고 삼정이정청은 슬그머니 없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1천만 조선 백성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나 안동 김씨와 그 일족에 들러붙은 양반 찌꺼기들만 행복하던 시대. 그 시대 안동 김씨의 영수가 김좌근이었다. 

     

    그런데 김좌근은 첩 하나에 미쳐 있었다. 전라도 나주 영산포 태생의 기생이었다. 성은 양씨라고 전해지는데 미모가 출중했다고 한다. 영산포 근처 어장촌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그녀가 지나가면 뭇 사내들이 넋을 잃고 보았다 전한다. 여러 동네 사람 홀리고 애닳게 했던 그녀는 기생이 된 뒤 소리와 가락을 익히고 춤을 배우면서 높으신 양반들도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안동 김씨의 수장 김좌근도 예외가 아니었다. 

     

    1853년부터 10년 동안 세 임금 아래에서 세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노회한 김좌근이었으나 양씨에게 미치다시피 했다. 소문에는 양씨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글씨 잘쓰니 달필이고 너는 노래 잘하니 달창이로구나" 입을 헤 벌리고선 당장 수레를 보내 양씨를 한양으로 데려가 살림을 차렸다고 야사에 전한다.

     

     

    안동 김씨의 수장 김좌근의 첩은 그냥 첩이 아니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한양을 내려다보고 싶사옵니다.” 청하자 김좌근은 대청에서 시야를 가리는 아래채 건물의 기둥을 깎아내 지붕을 낮췄고 집 앞의 민가들을 사들여 헐어 버렸다. 사람들은 양씨를 ‘합부인’으로 불렸다. 대원군이나 정1품 고관들에게 ‘합하’(閤下)라는 호칭을 썼거니와 그 정도의 위세를 부린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고향이 나주인지라 사람들은 ‘나합’이라고 불렀다.

     

    나합은 기고만장했다. 김좌근의 권세를 자기 것인양 사용해서 벼슬을 사고 파니 양반님네들이 떼로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고 관찰사며 지방 사또 직을 거래했다. 나라의 창고도 제것 보듯 했고 자신의 창고는 그득그득 재물로 채웠다. 남자 욕심도 많았던지 맘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몰래 끌어들여 정을 통했다고 하고 심지어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와도 썸싱이 있었다는 소문까지 있으니 가히 갈 데까지 갔다고 보아야겠다.

     

    하루는 집에 물 길어 주던 북청 물장수에게 북청 군수 자리를 선물하니 물장수는 별안간 사또가 돼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사람들은 뒤에서 ‘물장수는 무슨 물을 팔아서 사또를 샀나.’ 투덜거렸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좌근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면 난리가 났고 심지어 뺨을 때린 적도 있다고 했다. 정상적인 나라 같으면 당장 물고를 내거나 고향으로 쫓겨났어야 할 일이지만 끄덕없었다. 정신 나간 김좌근이 나합을 품에서 내놓지 않은 탓이다. 

     

    안동 김씨 세도가 물러간 뒤에도 나합은 김좌근 옆에 붙어 있었다. 보다못한 신정왕후 조씨 (헌종의 어머니, 당시 대왕대비)가 나합을 불러들여 죄를 물었다. “천한 기생 주제에 관직을 사고 팔며 권력을 휘두른 죄, 기생 주제에 정1품 호칭 ‘합’을 남용한 죄, 김좌근이 다른 여자 본다고 뺨을 때린 죄”였다.

     

    그러면서 닷새 안에 한양을 떠나라 명하니 은퇴한 김좌근이 살던 청수동 별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이고 데이고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김좌근도 울고 나합도 울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나서서 경복궁 중건 비용을 두둑히 받아내는 것으로 나합 추방령을 거두게 하였다고 전한다.

     

    김좌근의 공덕비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 전라도 나주다. 나주에 흉년이 들자 나합이 김좌근을 졸라 구휼미를 나주에 집중적으로 풀게 했고 그 때문에 세워진 공덕비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 세도가 끝난 뒤 한 선비가 도끼를 들고 외쳤다.

     

    “저 사악한 년이 이곳이 자기의 고향이고 이곳을 도운 김좌근의 성스러운 뜻을 받드는 성지(聖地)로 공덕비를 세우라 했다. 우리 먹은 쌀이 김좌근의 것도 아니고 덜떨어진 기생의 선심으로 얻은 것도 아닌 나라와 백성의 것이니 공덕비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 하니 나주 읍내 사람들이 몰려와 공덕비를 반으로 쪼개 길거리에 버렸다.

     

    후일 이것을 복원한 것이 현재도 나주 경내에 보관돼 있다. 어느 선비 탄식하여 가로되 나주가 나합같은 사악하고도 나라 망칠 여자를 낳았으니 반드시 나주의 대성 나주 나씨의 후손 가운데 비슷한 이가 나올 것이라 예언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그 심경을 남긴 한시가 전하는데 작자는 역시 미상이다. 사진은 왜 자꾸 잘못 들어가는 거냐.

     

    達唱打鈴輿便來 달창타령여편내 

    노래 잘 부르고 방울 두드리니 (한양에서) 수레가 왔네.

     

    翫錢戱彌稱巨宰 완전희미칭거재 

    돈 가지고 노는 놀음으로 두루 큰 재상 칭하고

     

    謨漏庫悍搔利濫 모루고한소리람 

    꾀는 나라 창고로 스며들어 이문을 사납게도 긁어 펑펑

     

    諸里議羅蛤泆世 제이의나합일세 

    여러 마을들이 나주 계집 해도 너무한다 쑥덕이도다.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 15 : 공룡의 성생활 2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 15 : 공룡의 성생활 2


            요약: 공룡들은 이상한 뼈구조물이 많은데, 아마 이성을 유혹하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재미지게...

     

     

     

     

    요약: 공룡들은 이상한 뼈구조물이 많은데, 아마 이성을 유혹하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재미지게 봐주세요!

     

     

    #60 패스트트랙 전투 그리고 천황


    2019년 4월 24일 공개방송       https://www.podty.me/episode/11659617   - 가카와 이재용의 프리즌트랙 : 주진우 기자 - 패스트트랙, 그리고 고해성사 :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박범계, 표창원 의원...


    2019년 4월 24일 공개방송

     

     

     

    https://www.podty.me/episode/11659617

     

    - 가카와 이재용의 프리즌트랙 : 주진우 기자

    - 패스트트랙, 그리고 고해성사 :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박범계, 표창원 의원

    - 바미당의 분당트랙 : 전 국회의원 정청래

    - 소득주도성장 중간평가와 3월고용동향 : 건국대 최배근 교수

    - 나루히토 일왕 즉위의 의미 : 게이센여학원대 이영채 교수 + 한동대학교 김준형 교수

    - 초경량 탐사보도의 등장 :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 김재영PD

    - 인간띠잇기 결산 : DMZ평화인간띠 운동본부 이석행+황인환

    - [예술로 함께] 출범! : 피아니스트 김철웅 + 테너 민현기 김철웅 단독콘서트2탄

    남북 가곡의 밤 http://bitly.kr/Cr79V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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